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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2010.12.27 기억 - 윤희 16
생각거리2010. 12. 27. 12:58

초등학교 3학년 때 잠깐 ㅊ동 양옥집 2층에 살았더랬다.

아침에 학교를 가려는데 길 한복판에 쥐ㅅㄲ가 납작하게 터져서
내장을 다 흘려버리는 통에 기겁을 하고 뒤돌아 집으로 뛰어 들어가
할머니를 크게 부르던 기억,
동네 꼬마녀석들(!!) 다 튀어나와 "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" "술래잡기"
따위를 하고 노는데 막내 동생을 업고 같이 뛰던 기억,
우리 집 앞집에 있던 넓은 마당과 수영장(!),
크리스마스 무렵에 문방구점에서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 재료를 사서
집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눈 오기 직전의 뿌연 하늘과
그래서 추운 날씨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지던 겨울 어느 날...

그리고 우리 앞집 지하방에 윤희랑 윤희네 엄마가 살았다.
어쩌면 윤희네 아빠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본 적이 없다.
그녀는 아침에 나와 학교에 같이 가는 길동무였으며
학교 끝나 놀다가도 "저녁 먹자!"라는 엄마들 외침에 헤어지는 사이였으니까.

매일 아침 나는 책가방을 메고 그녀의 집 앞에 가서 그녀를 불렀다. 
어김없이 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엄마와 함께 정성스럽게 감고 빨고 있거나
TV 앞에서 볶음밥을 먹으며 엄마가 꼼꼼히 땋아줄 수 있도록 긴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.
단 한 번도 우리집에 와서 "세정아, 학교가자!"라고 외친 적이 없던 그녀.
지금 생각하니 나는 왜 바보같이 맨날 그 집 앞에 가서 그녀를 불렀을까?
다른 친구들도 많았었는데...

여하튼 뇌리에 아주 깊숙히 박힌 장면은
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와 쪽진 그녀 엄마의 머리와.
빨간색 소세지가 들어있던(우리 할머니는 절대 안 넣어주시던, 그러나 너무 먹고 싶었던. ㅠㅠ) 볶음밥,
그리고 그녀의 귀여운 들창코.

가끔씩 윤희는 어디서 뭘하고 있을지 궁금하다.
지금 어디쯤에서 자신의 딸 머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땋아주고 있을지,
빨간색 소세지를 넣어 볶음밥을 볶고 있을지,
여전히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일지 아니면 다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을지,
직장을 다닐지, 집에서 살림을 할 지, 엄마랑 여전히 가깝게 지내는지 등등...

막상 나는 그녀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만 성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.
3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...


3학년 때 사진은 없고, 이건 2학년 때 사진 같음.

Posted by bibidi